이라크, 성소수자, LGBTQ, 전쟁, 사랑
브투 알라미(왼쪽)와 나이프 흐레비드. 모든 사진: 본인 제공
Extremes

이라크 전쟁 중 첫눈에 반해 ‘평생의 짝꿍’이 된 커플

남성은 특별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 겪은 일을 들려준다.

저는 쿠웨이트에서 태어나 이라크에서 자란 나이프 흐레비드입니다. 어릴 때부터 남과 좀 다르다고 느끼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고등학생 때 다른 남학생을 마음에 품고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또 더 나은 사람이 돼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가족도 일찍이 제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자동차를 좋아하던 형제와 달리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이라크 바그다드의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습니다. 졸업했던 2003년은 미국이 이라크에 들어왔던 때였습니다. 취업하기 좋은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영화와 대중문화를 통해 익힌 영어 실력을 발판으로 취업에 성공했습니다. 당시는 팝스타 마돈나와 브리트니 스피어스, 백스트리트 보이즈의 음악을 듣던 때였습니다. 미국 해군을 돕는 통역사로 일을 했습니다. 미국인이 이라크 문화를 이해하도록 돕고 동시에 이라크인이 미국인을 이해하도록 돕는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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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통역사 일이 재밌었습니다. 하지만 동료들은 차츰 저격수에게 공격당하거나 급조폭발물(IED)의 피해를 봤습니다. 머지않아 IED 때문에 길을 걸어 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헬리콥터를 타고 지붕에서 지붕으로 이동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해군과 거리를 순찰하다가 IED가 들어있는 소의 사체를 본 적도 있습니다.

어떻게 소의 사체에 설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의 옆을 지날 때 폭발물이 터지면서 앞에 있던 해군 2명이 바로 사망했습니다. 그때 죽음과 가까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모든 것이 갑자기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친구와 가족이 끊임없이 죽어 갔습니다. 제 목숨도 언제든 잃을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때 입대한 일을 몹시 후회했습니다.

이라크 라마디에서 이라크 신병에게 훈련을 제공하던 미국 해군과 일하던 때였습니다.

어느 날 샤워 중에 검은 머리가 태양 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이라크 군인을 봤습니다. ‘오, 여기 잘생긴 사람이 있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부대 안이었습니다. 당연히 그에게 커밍아웃할 순 없었습니다. 바라만 볼 뿐 말도 못 붙였습니다.

남성의 이름이 브투 알라미라는 건 알았습니다. 하지만 게이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함께 병원에 있는 테러리스트를 처리하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바로 그날 저녁 병원에서 브투와 처음으로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어둠 속에 함께 앉아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브투가 저와 마찬가지로 게이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중에 친구를 사랑하는 녀석이 있다고 넌지시 대화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줬습니다. 그리고는 본인 이야기를 더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몇 날 며칠 밤 서로의 친구에 관해 얘기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공유했습니다. 그렇게 말을 주고받던 중 눈이 맞았을 때 바라보다가 입맞춤을 주고받았습니다.

입맞춤을 했을 때가 처음으로 그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였습니다.

브투와 키스는 오랫동안 바라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군인들이 야간투시경을 들고 이곳저곳을 관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오랫동안 붙어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안 돼, 넌 네 부대로 돌아가. 난 미국인들한테 갈 거야.”

우리는 가능할 때마다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호텔 방이나 친구 아파트 가리지 않고. 죽음과 저격수, 폭탄이 깔린 곳에서 얼마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함께 앉아 밤을 보낼 때면 모든 생각을 잊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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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군복을 입은 브투 알라미. 사진: 본인 제공

어느 날 성소수자의 삶을 그린 미국 드라마 ‘퀴어 애즈 포크’를 본 뒤 말했습니다. “미국에는 게이바도 있고 결혼하는 커플도 있어.” 우리는 이 얘기를 나눌 때 세상의 저편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위험에 처한 통역가들을 위해 특별 망명 프로그램을 제공했습니다. 프로그램에 지원해 면접을 봤는데 망명자로 받아줄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일이 쉬워 보였습니다. 제가 먼저 미국으로 건너가 남자친구가 있다고 말하고 브투를 데려오면 같이 오래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를 남겨두고 떠나는 건 너무 힘들었습니다. 우리는 공항에서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떠오르는 태양 빛 사이로 눈물을 봤습니다. 그가 보여주지 않으려고 그렇게 숨겼지만. 그에게 우리는 조만간 다시 볼 거고 곧 미국으로 데리고 올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수년이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미국 이민국은 그가 군인 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매번 입국을 거절했습니다. 브투는 결국 4년 후 캐나다로 망명했습니다. 2013년 제가 살던 미국 시애틀과 차로 2시간 거리인 캐나다 밴쿠버에 자리 잡았습니다. 보고 싶을 땐 언제라도 보러 갈 수 있었습니다. 2년6개월 동안 매주 운전해 갔습니다.

저는 그동안 미국 시민권을 얻었습니다. 이때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이끌던 미국이 50개 모든 주에서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시기였습니다.

“일단 캐나다에서 결혼하자. 그리고 너를 미국에 데려와 살 수 있는지 알아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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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투 알라미(왼쪽)와 나이프 흐레비드. 사진: 본인 제공

우리는 정말 말 그대로 해냈습니다. 2014년 밸런타인데이에 결혼했습니다. 서류 작업 후 비자를 위해 인터뷰를 봤습니다. 담당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축하해요. 미국에서 살 수 있는 비자가 나왔어요.”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담당자를 보면서 다시 말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비자를 발급해드릴 수 있습니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소리를 질렀습니다. 살면서 낸 가장 큰 목소리로 소리 질렀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온 순간이었습니다. 항상 그와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내려두고 이라크를 떠날 때 제가 함께한다고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사랑은 단순히 느끼는 감정만은 아닙니다.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를 뜻하기도 합니다.

“사랑은 단순히 느끼는 감정만은 아닙니다.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를 뜻하기도 합니다.”

여전히 자신을 숨기면서 고군분투하는 성소수자 친구에게 조언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인생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알라는 겁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의 주인공이니까요. 타인이 기대하는 대로 맞춰 살려고 한다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습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이 섹스만 한다고 생각하지 사랑을 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우리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사랑했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을 겪었고, 무엇을 해냈는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기사는 VICE 팟캐스트 ‘익스트림’의 에피소드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Nayyef Hrebid, Btoo Alla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