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줄만 알았던 ‘억만장자의 여자’로 살아가는 삶

#30 Adnan and Me

20살이던 1980년. 프랑스 파리에서 모델 일을 했다. 인기 모델까지는 아니었지만 1년을 활동하면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러다가 잡지의 표지를 장식할 정도로 기반을 쌓았다. 고된 노력 후에 얻은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삶은 그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다지 만족한다거나 삶이 보람차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이 시점에 연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모델 에이전트가 늦여름 어느 날 주말 모나코의 몬테카를로로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항공권과 호텔 비용을 물었더니 무료라고 했다. 모델계에는 언제나 함정이 있기 마련이다.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었지만 그때는 휴가가 너무 간절했던 터라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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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모델 활동하는 미국 여성 질 도드

호텔에 도착한 후 비싼 술을 마시며 경치를 감상했다. 그렇게 꼴딱 반나절이 지났다. 그날 저녁 에이전트가 리무진에 태우더니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열린 해적 테마 파티로 데려갔다. 모닥불이 피워져 있는 성대한 야외 행사였다. 파티를 즐기던 중 나이 든 남성 한 명이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말하면 좀 변태 같지만 특별한 이유 없이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와 모래사장으로 나가 춤을 췄다.

그는 모닥불이 맹렬히 타오를 때 갑자기 그 속으로 샴페인 잔과 의자를 던졌다. 그러고 나서 커다란 파티용 식탁에 날 앉혔다. 그는 눈을 바라보다 내 소매를 걷어 팔뚝을 드러내더니 거기에 자신의 피로 ‘사랑해’라고 적었다. 잔을 불 속으로 던지다가 손을 벴던 것 같다. 그에게로 점차 빠져들고 있었다.

나중에야 그가 세계적 갑부이자 전설적 무기 상인인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아드난 카쇼기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사업을 여러 개 지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부동산과 저택을 보유했다. 또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전세기와 요트 ‘나빌라’를 보유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80년에는 인터넷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누군지 알아내려 구글에 검색해 보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무작정 뛰어들어 스스로 하나둘 조각을 맞춰 나갔다. 그 과정에서 억만장자와 연애하는 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멋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 돈

다음 날에도 아드난을 만났다. 몇 주가 지나고 스페인으로 초대받았다. 그때 아내 중 한 명이 돼 달라는 고백을 받았다. 머뭇거렸지만 승낙했다. 그렇게 ‘그들이 사는 세계’의 일부가 됐다.

처음엔 넘치는 돈이 새롭고 이상했다. 또 흥미로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하게 느껴졌다. 케냐에서 아드난에게 20캐럿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 받았을 때 만해도 분에 넘치는 것 같아 거절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람이 달고 다니는 값비싼 보석을 계속 보다 보니 결국 원하게 됐다. 유명 디자이너가 만든 옷을 저녁 식사 때 착용했다. 요리사가 준비한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먹었다. 기사를 대동해 리무진과 전세기로 이곳저곳을 다녔다.

차츰 그와 따로 있을 때조차 이런 삶을 원했다. 모델로 일하며 로스앤젤레스의 집에 있을 때도 고급 식당에 가야하는 적당한 변명을 만들었다. 웨이터가 하얀 유니폼을 입은 채 시중을 들고 하얀 식탁보가 깔린 고급 식당에 가고 싶었다. 상류층처럼 명품 옷을 입고 은은한 조명 아래 촛불이 일렁이는 곳에 가고 싶었다. 그동안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친한 친구와 시간을 보낼 때에도 상류층의 생활이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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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 남성 아드난 카쇼기와 미국 여성 질 도드가 스페인에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불안과 불만족의 씨앗이었던 돈

결혼 1주년 이후부터 심각한 불안에 시달렸다. 뭘 해도 진정되지 않았다. 언제나 다음 목표를 좇는 아드만처럼 변했다. 또 그가 다른 미인과 비즈니스, 마약을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처럼 비슷한 방식으로 내면의 공허함을 채웠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한해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혼란스러웠다. 뭐든 다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허무했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 목표로 아등바등 살았던 과거가 한순간에 무의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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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비싼 보석을 착용한 미국 여성 질 도드

언제나 뭔가를 원했던 주변 사람들

처음 관계가 시작될 때 질투는 하지 않았다. 아드난이 시간만 생기면 다가오는 걸 보고 그의 애정을 확신했다. 그러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패션 디자인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공부할 내용이 많아 그와 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야 했다. 자리를 비울 때 그는 일에는 별 관심 없는 사람과 시간을 보냈다. 일부는 코카인에 중독된 것 같았다. 공통점은 모두 그의 돈을 원했다는 거다. 난 그들과 다르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그러다 어느 날 밤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한 여성 무리를 만났다. 그중 하나가 아드난이 줬다며 반지 하나를 보여줬다. 내 반지와 똑같았다. 명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제야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이때 관계가 곧 끝날 거라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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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행복

그날 밤 이후 머지않아 그와 헤어졌다.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래도 안도감이 컸다. 부를 이용해 행복을 좇는 건 그림자를 따라다니는 것과 같았다. 그 어떤 물건이나 부도 마법처럼 인생을 충만하고 평화롭게 만들지 못했다. 마음의 평화는 물건이나 권력, 지위, 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개인의 여정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 전보다 결함을 더 쉽게 받아들인다. 훨씬 더 많은 것에 감사한다. 또 타인을 연민한다. 남을 편협한 잣대로 판단하려 하지 않는다. 친구와 가족의 사랑 속에서 삶의 충만히 느끼고 주어진 독특한 재능으로 예술 활동을 하며 성취감을 얻는다. 기나긴 치유의 과정을 견뎠다. 그리고 마침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존중하게 됐다.

Jill do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