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장소에서 정해진 포즈로 찍는 결혼사진. 커플들은 보통 결혼식에 앞서 이런 사진을 얻기 위해 평소 안 입던 옷을 걸치고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서로를 낯설게 바라본다. 이 순간은 이젠 사이가 너무나 익숙해진 장기 연애 커플조차도 서로가 낯설어지는 시간이다. 그런데 관습처럼 굳어진 문법을 깨고 새로운 결혼사진에 도전하는 신인 사진작가가 있다. 제주도에서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한기재(31)씨다. 한 작가는 ‘관계’와 ‘감정’에 초점을 두고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사진을 촬영해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젊은 세대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
한 작가는 지난해 제주도로 거주지를 옮기고 전업 작가로서 첫발을 내딛었다. 결혼사진의 관습을 따르기보다는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해보려고 했다. 오랫동안 지켜진 전형적인 웨딩사진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두 사람의 사랑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꼭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히지 않아도 된다.’ ‘반드시 정해진 앵글 안에 두 사람 얼굴을 선명하게 고화질로 담아내지 않더라도 괜찮다.’ VICE는 최근 한 작가의 첫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용산구 갤러리 필로소피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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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E: 웨딩사진을 찍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한기재: 웨딩사진과 개인사진 작업을 병행하고 있어요. 제주도에 내려와서 전업 작가로 선택지가 많이 없었고 생계를 유지하려고 시작했어요. 또 단순히 풍경이나 정물 사진 작업보다 스토리가 담긴 사진 작업을 좋아해요. 저한테 가장 잘 맞다고 생각했어요.
새로운 커플사진을 찍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웨딩사진 시장에는 굳어진 촬영 방식이 있어요. 사실 똑같은 장소에서 정해진 포즈로 찍는 방식이 찍는 사람 입장에선 더 효율적이에요. 대부분이 웨딩홀 포토북을 만들려는 목적이죠. 회의감을 느꼈어요. 제가 결혼한다면 그런 사진을 찍고 싶진 않았죠. ‘내가 결혼한다면 어떤 사진을 찍고 싶을까.’ 수트 같은 예쁜 옷을 입고 찍는 사진이 아니라 관계를 보여주는 사진을 찍고 싶었어요. ‘둘의 감정이 이렇구나’라고 느껴지는 사진이요.
새로운 사진을 찍기 위해 어떤 시도를 했었나요?
커플이 촬영할 때 포즈를 바꾸려고 했어요. 기존에는 카메라를 쳐다보거나 서로를 보고 있거나 안고 있거나 입을 맞추죠. 스킨십이 같은 포즈로 굳어 있다고 생각했어요. 커플이 달리고 있거나 서로한테 뛰어가서 안기거나 넘어지는 동작을 시도해보기 시작했죠.
카메라의 셔터스피드를 낮춰서 일부러 화면이 흔들려 보이게 한 적도 있고요. 보통 잘 알려진 예쁜 장소를 찾기보다 인적이 드물고 좋은 색감을 나타내는 장소를 찾았어요. 기존에는 배경 위주의 사진이 많았지만 배경이 얼마나 예쁜지보다 인물에 초점을 맞췄죠. 좋은 색감만 있다면 어디든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대부분은 비가 내리면 촬영을 연기하는데 비 오는 날에도 감행해 악조건 속에서 감정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도록 촬영했어요. 악조건이면 악조건일수록 커플의 아름다운 감정이 더 돋보인다고 생각했거든요.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어떤 피드백을 받았나요?
사진이 신선하고 예쁘다는 말을 들었어요. 색감과 구도가 새롭다고요. 인물의 감정이 물씬 드러나서 좋다는 반응이나 앞뒤 상황을 유추하게 한다는 말도 들었어요.
촬영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커플이 있었다면?
한 커플은 만난 지 한 달도 안 돼 결혼식장을 예약하고 촬영 예약하시는 분이 있었어요. 또 서로 애증의 관계였던 커플도 기억에 남아요. 보통 여성분이 촬영에 더 협조적이고 남성분은 촬영에 비협조적이에요. 그런데 이 커플은 남성분이 더 적극적이셨죠. 감수성도 굉장히 풍부하신 것 같았어요. 언제나 음악을 틀고 작업하는데 눈물도 흘리셨어요. 또 다른 커플은 모두 예술을 전공하신 분이었어요. 이분들은 저를 상업작가가 아니라 예술작가로 존중해주셔서 인상적이었어요. 촬영 끝나고 식사하면서 대화도 나눴죠.
음악을 항상 틀어놓고 촬영하는 이유가 있나요?
사실 촬영 때 음악을 트는 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저도 그렇지만 커플들도 사진 촬영 자체가 익숙하지 않아서 긴장하는 경우가 많죠. 음악이 이때 어색함과 긴장감을 풀어줘요. 두 번째로는 음악이 제가 머릿속으로 그리는 장면 속에 커플이 녹아들어 가게 해줘요. 한마디로 음악이 장소마다 분위기나 주제를 바꿀 때마다 분위기를 맞춰주는 거죠.
보통 숲이나 들판, 바다 세 장소에서 작업해요. 숲에서는 주로 재즈나 중간 빠르기의 시티팝 같은 감성적인 음악을 틀어드려요. 들판에서는 쾌활하고 자유로운 느낌의 음악, 바다에서는 잔잔하고 서정적인 음악을 틀어요. 또 바다에서는 연출을 최소화하려고 해요. 커플이 카메라를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고 현장 분위기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거죠.
본인이 결혼할 땐 어떤 웨딩사진을 찍고 싶나요?
사실 모든 사진은 제가 찍고 싶은 장면이긴 해요. 커플이 사랑스러운 동작과 거리가 먼 동작을 할 때도 사랑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저는 그런 장면이 매우 예쁘게 느껴지더라고요. 예를 들어 장난스럽게 헤드록을 한다거나 서로 붙잡고 늘어진다거나 사랑한다는 전제가 없다면 공격적으로 보일 수 있는 동작이잖아요. 하지만 사랑한다는 전제가 있는 경우라면 이런 동작도 굉장히 사랑스러워 보이더라고요.
촬영할 때도 커플분들에게 ‘동작 자체가 중요한 건 전혀 아니다’라고 항상 말씀드려요. 동작은 서로의 감정을 드러내는 도구일 뿐이지 목적 자체가 아니니까요.
커플을 찍는 작가가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인가요?
서로 섞일 수 없는 다른 감정이 뭉친 구체. 좋아하는 마음, 설렘, 냉담 등 핑크빛 감정뿐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까지 여러 감정이 모인 감정의 덩어리가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을 대표하는 키워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생각해봤는데 ‘감정’과 ‘관계’라고 생각해요. 사랑뿐 아니라 낯섦,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도 개인작업으로 더 풀어보고 싶어요. 전 신학을 공부하고 신학교를 나오다 보니까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집중해요. 관계도 꼭 연인 관계가 아닐 수 있죠. 다른 사람과 관계나 사물과 관계이거나. 모든 관계의 관계성을 드러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