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22세 남성은 4년 전 연애할 때 첫 두 달간 연애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상대와 자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다른 사람과 하지 못한 깊은 대화도 나눴다. 서로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영혼의 단짝을 만났다고 믿었다.
하지만 대학 진학을 위해 다른 도시로 이동하자 모든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대화도 카카오톡의 상태메시지처럼 짧아지고 무미건조해졌다.
패션을 공부하는 남성 하르싯 프라자파티는 VICE와 인터뷰에서 이때 상황을 회상했다.
그는 “장거리 연애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며 “관계 유지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정리해 애인에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고 털어놨다.
애인은 걱정도 없고 모두 괜찮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여행 등 함께하는 활동을 계획하거나 관계에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을 찾아내도 수긍할 뿐 적극적으로 나서진 않았다.
프라자파티는 애인뿐 아니라 주변 친구와도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자 점차 지쳐갔다. 그는 “침대에 앉아서 드라마를 보면서 시간을 때우거나 불도 안 켜고 할 일을 했다”며 “자존감이 떨어졌고 스스로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돌이켜보니 애인은 ‘조용한 이별’을 준비했다. 조용한 이별은 당사자 한 명 또는 두 명 다 관계가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노력만 하면서 이별은 미루는 행위다. 번아웃을 피하려고 해고되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만 일하는 ‘조용한 퇴사’와 비슷하다.
조용한 이별이란 말은 틱톡 코미디 크리에이터 대니얼 헨셜이 처음 쓴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영상에서 “흥미를 완전히 잃었지만 이별하고 싶진 않을 때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매일 몸은 함께 있는데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심리학자 에라 두타는 애인이 조용한 이별을 할 땐 무관심한 룸메이트나 애인의 모습을 한 유령과 사는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함께 있어도 즐겁지 않고 행복하지 않다.
두타는 “관계가 만족스럽지 않은 데다가 조용한 이별을 당하고 있다면 자신의 가치에 의문을 품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따지게 된다”며 “커플 상담을 받는 분위기도 아니라 이런 경험을 하면 무기력해지고 정신 건강에 타격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직장인의 조용한 퇴사와 달리 연인 간 조용한 이별은 바로 알아차리기 어려울 수 있다. ‘잠수 이별’과 달리 조용한 이별은 마음은 떠났지만 겉으론 곁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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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치료사이자 정신과 의사인 나힛 다베는 “연인 관계를 지속하려면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함께 성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연애 첫 몇 주나 몇 달까진 상대를 만나거나 스킨십할 때마다 도파민이 솟구친다”며 “하지만 강렬한 감정이 잦아들면 지루함과 거리감을 느껴 자기도 모르게 조용한 이별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베는 우리가 채팅이나 영상통화를 통한 비대면 소통에 익숙한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애인이 조용한 이별을 하고 있는지 전보다 더욱더 알아차리기가 어려워졌다고 전했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 사용을 요청한 28세 대학원생 소먀는 조용한 이별을 한 이유는 상대와 커리어 목표가 달랐고 서로를 향한 애정도 차츰 식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환경 등 외부적인 요인이 작용하기도 한다. 소먀는 코로나19로 인해 도시 봉쇄가 일어났을 때 고향인 인도 차티스가르 주도 라이푸르에서 나오지 못하고 갇혀 지냈다. 자존감이 떨어지고 정신 건강이 악화했다. 그래서 연애보다 자신에게 신경 쓰기로 했다. 하지만 애인에게 전과 달리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지 않다고 말할 용기가 안 났다.
소먀는 “고의로 조용한 이별을 한 건 아니다”라며 “자신을 돌보며 기분이 나아지면서 애인한테 쏟는 시간을 줄였다”고 말했다. 그는 “먼저 관계를 끝내고 싶진 않았다”며 “상대가 먼저 내게 질려서 떠나가길 바라면서 거리를 차츰 두기 시작했다”고 털어놨다. 이어 “그때쯤 우리는 이미 6년 차에 접어들어서 서로에게 아주 익숙해진 상태였다”며 “이해심 많은 애인을 다시 찾지 못할까 봐 두려워 관계를 끌다 이별했다”고 덧붙였다.
심리치료사 디팍 카시압은 조용한 이별의 이유로 감정적 불만족이 매우 크다고 봤다.
카시압은 “일부 여성은 경제적 독립이 어려워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며 “어머니 세대 여성이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있다면 남편과 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 애인이 자기 처지에서 최선이라 믿고 유지하려고 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또 “조용한 이별을 선택한 사람들이 전부 심사숙고해 내린 결정은 아닐 것”이라며 “대중문화 영향으로 관계에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사실 연애가 한결같이 설렐 수는 없어요. 상대가 설렘을 매일 느끼게 해줄 거라고 기대하는 건 올바르지 않아요. 인간이니 항상 비용과 이익을 따지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애인은 효용을 따져야 하는 상품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길 바랍니다.”
카시압은 “3~4년 차 이상 커플이 매일 ‘뜨거운 밤’을 보내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며 “정상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관계에 균열이 생기는 원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덧붙였다.
다베는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기보단 함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상대를 비난하지 말고 겪고 있는 문제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말해줘야 합니다. 이상적인 관계를 한마디로 정의할 순 없어요. 자신의 기대와 현실을 비교해 적어보세요. 또 자기 생각을 의견과 사실로 구분해보고 문제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하면 문제라고 느끼는 것들이 오해인지 객관적으로 합당한지 알 수 있어요.”
다베에 따르면 우리 두뇌는 사별보다 미련이 남는 상대와의 이별을 더 힘들게 받아들인다. 죽음은 희망을 남기지 않지만 미련이 남는 상대는 희망을 남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