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멍때리기 대회’가 3년 만에 돌아왔다. 대회는 바쁜 현대 사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뒤처지거나 무가치한 것이라는 통념을 지우고자 만들어졌다. 주최 측인 서울시와 웁쓰양컴퍼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가치 있는 행위라고 보여주기 위해 멍때리기를 가장 잘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현대 퍼포먼스 아트”라고 설명했다.
배우 엄현경씨를 비롯해 멍때리기 실력을 자신하는 학생과 직장인, 취업준비생, 자영업자 등 50팀은 지난 18일 서울 서초구 잠수교에 마련된 대회장에 모여들었다. 주최 측에 따르면 참가자들은 멍때리기를 좋아하는 지원자 3800여명 중에 신청 사유를 바탕으로 다양한 성별, 연령, 직업이 어우러지게 추려진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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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E는 이들이 멍때리는 현장으로 찾아가 ‘멍때리기를 왜 사랑하는지’, ‘대회에 꼭 참가하고 싶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어봤다. 참가자들은 다소 새로운 활동인 집단 멍때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답게 개성을 뿜어내는 독특한 의상을 입고 대회장에 나왔다.
핑크색 가발을 쓰고 대회에 참가한 직장인 윤상훈씨는 “열심히 직장을 다니다 보면 평소에 멍때릴 시간이나 쉬는 시간이 거의 없다”며 “멍때리기를 통해 힘든 일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어 좋았고 머리를 쉬게 하니까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도 좋아졌다”고 말했다. 눈에 띄는 가발 색깔과 표정 때문에 여러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을 받은 상훈씨는 “멍때리기 경기할 때는 방해가 되기 때문에 아무 생각도 안 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대회 참가자들은 기체조로 간단하게 몸을 풀고 1시간30분 동안 어떤 행동과 말,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다만 경기 중에 색깔 카드를 머리 위로 들어 진행 요원에게 보여주면 ‘마사지 서비스’와 ‘물 서비스’ ‘부채질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수상자인 최종 1, 2, 3등은 심박수와 현장 시민투표를 모두 합산한 점수로 가려진다.
체육 교사 한지원씨는 양산을 들고 대회에 참가했다. 지원씨는 “평소 멍때리기가 장점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장점을 살릴 기회가 있어 참가했다”며 “멍때리느라고 90분이 짧게 느껴져 아쉽고 다음에는 3시간 정도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정말 아무 생각이 안 들었고 시간이 빨리 지나간 것처럼 느껴졌다”고 덧붙였다. 지원씨는 평소 햇빛에 많이 노출되는 일을 하는데 햇빛을 가리고 멍때릴 수 있어서 좋았다고 전했다.
배우 지망생인 박솜이씨는 “요즘 슬럼프를 자주 겪고 있고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라며 “생각을 비우고 싶어서 지원했다”고 설명했다. 멍때리기는 그에게 어떤 경험이었을까. 솜이씨는 “대회 전에는 오래 멍때리고 있으면 복잡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줄 알았는데 막상 참가해보니 머리가 오히려 깨끗하게 비워져 좋았다”고 답했다.
트위치 스트리머 도유밀씨는 참가 동기를 묻는 질문에 “트위치 시청자분들이 알려주셨고 심신이 불안정한 것 같아 참가했다”고 말했다. 이어 우승 전략을 묻는 질문엔 “경기 중 머릿속으로 좋아하는 영화 두 편을 첫 장면부터 생각해보려고 했다”고 털어놨다. 올해 3위를 차지한 미군 프랭크 레인은 “아내가 대회 정보를 보고 지원할 수 있도록 도와줘 정말 고맙다”며 “대회를 넘어 예술 행위라는 점이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올해 우승을 거머쥔 참가자는 김명엽씨였다. 명엽씨는 “평소 창의성을 많이 필요로 하고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일을 해서 멍때리기를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며 “우연한 기회에 알게 돼서 신청을 했는데 생각보다 좋은 성적이 나와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야구팀 한화이글스의 팬이라고 소개했다. 명엽씨는 “앞에 등이 넓은 남성 분이 앉아 계셨는데 한화이글스가 경기에서 지는 장면을 상상하니 자동으로 멍이 때려졌다”고 말했다.
대회의 창시자 아티스트 웁쓰양 작가는 매년 서울시와 협업해 멍때리기 대회를 열고 있다. 작가는 쉬는 시간에도 ‘나 혼자 멈춰있는 게 맞나?’라고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보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다. 작가는 집단으로 멍때리는 사람들과 바쁜 현대인들을 시각적으로 대조해 무언가를 하고 있어야만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는 사회 분위기에 저항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