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매운맛을 즐긴다. 하지만 가장 매운 라면으로 불리는 ‘핵불닭볶음면’을 먹었을 땐 알레르기와 비슷한 반응을 겪었다. 몇 입만 먹었는데 매운맛이 입안을 채웠다. 숨을 내쉬어 없애려고 해도 가시지 않았다. 빨래 건조기가 돌아가듯 맴돌았다. 얼굴은 퉁퉁 부었다. 숨이 가빴다. 10km 마라톤을 전속력으로 달린 것 같았다. 뜨겁고 짠 눈물 사이로 눈을 가늘게 뜨니 두 주먹을 무의식적으로 꽉 쥐고 있었다. 이런, 우유를 깜빡했다.
애초에 계획이 잘못됐던 걸까. 최근 내린 결정에 의구심을 품었다. 지금 지내는 나라부터 직업, 헤어스타일까지. 판단력에 문제가 생겼던 것 같다. 한국인의 스트레스 치료법을 적은 책에 나오는 매운 라면으로 요즘 생긴 불안감을 없애려 해본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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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2017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 중 멕시코 다음 두 번째로 장시간 일하는 나라다. 한국인은 과로로 받는 스트레스를 풀려고 매운 떡볶이나 국수, 찌개를 먹는다. 마음이 아프고 우울할 때도 마찬가지다. 매운 음식을 먹으면 엔도르핀이 몸 전체에 나오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걱정과 불안을 잊을 수 있다. 그러나 매운맛의 종류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매운맛은 여러 종류가 있고 서로 미묘한 차이가 있다.
짜증 나는 매운맛
이 맛은 일 스트레스 해소에 특히 효과적이다. 불은 불로 다스려야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짜증 나는 매운맛을 경험하면 얼굴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다른 맛이 생각나지 않는다. 불쾌할 정도로 맵다. 얼굴과 등에 땀이 줄줄 난다. 혀가 마비된다. 콧물이 흘러 불편하고 짜증 난다. 국물을 꿀꺽꿀꺽 삼키거나 매운 떡볶이를 마구 씹곤 고통에 헉헉거리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미친 상사와 불합리한 마감 시간, 참을 수 없는 동료와 있었던 일은 매운 음식 한입과 함께 증발한다. 매운맛으로 정신을 놓았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날리려면 매운 음식을 쉬지 않고 빨리 먹기를 추천한다. 경험적으로 알겠지만 매운맛이 가시기 전에 또 먹어야 완전한 효과를 볼 수 있다. 힘들어도 계속 먹다 보면 황홀한 느낌을 받게 된다. 살짝 어지럽지만 모든 고민이 사라진다. 오래가진 않겠지만.
서울 영등포구의 ‘신길동매운짬뽕’의 주인은 “(믿거나 말거나) 1년에 약 10명이 기절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튜브 채널 DKDKTV의 영상에서 “힘드신 분들, 우울증 오는 분들, 스트레스 많이 받는 분들, 10분이면 싹 날아가게 돼 있다”고 말했다.
맛있는 매운맛
짜증 나는 매운맛과 달리 맛있는 매운맛은 부드럽게 울려 퍼진다. 한 입을 먹으면 더 먹고 싶어진다. ‘힐링 푸드’처럼 마음이 아프거나 우울한 사람들에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짜증 나는 매운 음식처럼 맛이 극단적이지 않다. 오히려 따뜻한 보호막이 감싸주는 느낌이다. 엄마가 “괜찮아, 괜찮아”라고 다독여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좋은 칵테일처럼 강렬함은 끝에 찾아온다. 짜증 나는 매운맛을 먹을 땐 금방 “왔어”라고 소리치게 된다. 반면 맛있는 매운맛을 먹으면 그 순간이 더 천천히 다가온다.
시원한 매운맛
이 맛은 앞뒤가 안 맞는 것처럼 들린다. 외국인들은 맵고 뜨거운 찌개를 한 숟가락 떠먹은 뒤 ‘시원하다’고 외치는 한국인을 볼 때 정말 혼란스럽다. 한국인이 음식을 먹을 때 ‘시원하다’고 말하는 건 맵고 뜨거운 국물을 먹고 난 후 느낌의 표현이라고 들었다.
2016년 ‘에스닉푸드저널’에 게재된 논문은 ‘시원하다’라는 표현을 이렇게 설명했다. 음식이 입의 부드러운 조직에 닿을 때와 목 안으로 넘어갈 때, 위에서 소화될 때 느껴지는 감각과 연관이 있는 표현이다. 향이나 맛보다는 몸으로 느껴지는 경험이다.
시원한 국물은 한국인에게서 고통을 덜어주는 ‘만병통치약’처럼 보인다. 시원한 국물을 마시면 긴장된 근육이 풀리고 마음이 가라앉는다. 뜨거운 국물이 목구멍으로 흘러 내려 소화관을 통과할 때면 따뜻해진다. 심호흡하고 안도의 숨을 크게 쉴 때처럼 말이다.
맛있는 매운맛이 중독적이면서 혀로 경험하는 맛이라면 시원한 매운맛은 익숙한 매운 음식에서 느낄 수 있는 온몸으로 경험하는 맛이다.
돌이켜보면 불닭볶음면을 먹고 시원한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열기가 가시면서 황홀한 기분은 사그라들었다. 불쾌한 기억도 점차 희미해졌다. 하지만 매운맛에 숨겨진 훈제향 나는 달콤한 맛은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얘기하다 보니 촐촐해졌다.
‘불닭 볶음 아몬드’ 한 봉지를 어딘가 놔뒀는데 찾아봐야겠다.